연꽃이 떠 있는 연못을 가진 집
주한 미국 대사 허바드 부부
매거진 Neighbor, 2002년 8월
해태가 앉아 있는 정원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독립기념일 파티와 오레곤 주(州)에서 공수해온 더글라스 전나무로 만든 들 보, 그리고 기와를 얹은 지붕 위에서 날리고 있는 성조기.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올라간 언덕 위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에는 동양과 서양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다.
처음 씩씩하게 인사를 나누자마자 조안 허바드(Joan Hubbard) 여사가 꺼낸 첫 마디는 ‘이 집에 살게 되어서 영광(honor)입니다’ 라는 말이었다. 과연 30여 년 동안 외교관의 아내로서 살아오며 머문 모든 대사관저 중에서 최고의 관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녀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푸른 나무 사이로 드러난 한여름밤 파티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원에서부터 이 집을 지켜주는 듯 듬직하게 자리를 잡은 해태, 전통적인 외양이 그대로 살아있는 본채까지 참으로 보는 이를 감동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서까래가 보이는 높은 천장을 가진 집의 한가운데에는 미음(ㅁ)자 모양의 정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포석정을 닮은 작은 연못이 있다. 허바드 여사는 날씨만 허락한다면 아침마다 그 정원에서 식사를 즐기는데 특히 요즘은 연꽃이 피기 시작해 더욱 아름답다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작년 10월부터 이곳에서 살게 된 그 녀는 그동안 도미니카 공화국, 일본,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살아보았지만 전통적인 가옥에서 살아본 것은 일본과 한국뿐이란다.
사실 하비브 하우스의 내부는 중앙 난방 시스템이나 입식이라는 면에서 많은 부분 서양의 집에 가깝기도 하다. 이미 한국 정부조차도 전통양식으로 건물을 짓지 않던 시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한옥의 대가인 ‘목수(木壽)’ 신영훈 선생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에 의해 1973년 새롭 게 지어진 미국 대사관저는 전통적인 한국의 건축양식에 미국의 생활방식과 건축자재를 도입한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관저가 하비브 하우스라고 불리는 것은, 새로 관저를 짓는다면 주재국의 전통양식에 따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 당시 필립 C.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의 이름을 땄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파와 러그, 그랜드 피아노가 부채며 불상 등과 어울려 이 집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본의 사케 잔이나 한국의 자기 등 각국의 전통적인 소품들이 여기저기 자리 를 잡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그녀가 아끼는 것은 찬합과 도 자기들이라고. 서양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아시아 만의 특별한 소품 중 하나라며 그녀가 조심스레 열어 보이는 미얀마에서 발견한 나무로 만든 찬합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일인용 찻잔까지 들어 있다.
조안은 어느 나라나 독특하고 특별한 문화를 가지고 있 지만 한국은 ‘그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 특히 놀라운 나라’ 라고 말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준 것처럼 자발적이고 열렬한 혼을 가진 국민들은 어찌 보면 미국인들과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또 그녀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은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다정다감한 사람들이란다. 우리가 흔히 스스로를 배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기도 하다.
대사관저라는 곳이 사실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있는 나만의 집은 아니지만 혹시 손을 보거나 고친 곳이 있냐고 묻자 이 집에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이 집에 이사와서 그녀가 한 것이라고는 그림을 걸고 책과 CD를 가져다 놓은 것뿐이란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는 그림이 참 많다. 거실이나 다이닝룸은 물론 게스트룸 앞의 높은 벽에까지 그림들이 걸려 있다. ‘아트 인 디 엠버시즈(Art in the Embassies)’ 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해외 주재 미 대사관저에 18세기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예술 작품들을 3년 간 전시하도록 빌려주는 시스템이다. 자국의 미술을 좀더 많은 이들이 즐기고 감상할 수 있 도록 하는 미(美) 국무성의 노력 덕분에 그녀는 서울로 오기 전 뉴욕의 갤러리 몇 곳에 들러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마음껏 골랐다며 웃는다. 그녀의 환한 표정과 잘 어울리는 대담한 컬러의 현대적인 미술품들은 고전적인 집의 틀과 또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우연인지 그녀가 고른 작품 중 셋은 한국계 미국 작가들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 프로그램을 좀 더 효율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 그녀는 앞으로 대사관저의 일부를 공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을 열고 들어와 감상할 수 있는 대사관저를 만들려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미국 선수단과 함께 한국을 찾은 그들의 가족들까지 초청하여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는 그녀는 인터뷰 다음날 있을 독립기념일 파티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공식적으로도 또 사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에 어쩌면 그냥 스쳐가는 사이가 될수도 있지만 조안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보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이 솔직하고도 열정적으로 그림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모습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더운 날씨에 찾아와주어서 고맙다며 등을 쓰다듬어주는 손길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 나진을 찍기 위해 곱디고운 붉은 빛의 재킷으로 갈아 입는 소녀스러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디터 황유미 / 사진 도재홍
미국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
기존의 세종로 대사관 건물에서 이전하는 미국 대사관의 신축사업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를 만나보았다. 옛 덕수궁 터에 새 대사관 건물과 55가구의 직원 아파트를 포함하는 이 프로젝트의 마스터 플랜을 제시한 MGA 건축사 사무소(Michael Graves & Associates)의 대표인 그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는 지난 30여 년 간 캘리포니아의 디즈니 본사, 텍사스의 연방 준비 은행(Federal Reserve Bank), 필라델피아 이글스(Eagles) 축구팀의 본부와 트레이닝 센터 그리고 국무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선도하는 건축가로 활약해왔다.
한·미 관계라는 어쩌면 조금 미묘할 수도 있는 상황 아래 미국 대사관을 포함한 외교 공관타운을 짓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새로 건축될 대사관과 직원용 아파트는 주변 환경과 최대한 조화를 이룰 것이라며 확고한 자신감을 표현한다. 이미 경기도 용인의 레이크힐스 컨트리클럽의 클럽하우스를 설계하는 등 13번째 로 방문하는 한국을 어느 정도는 잘 이해하고 있으며, 또 1년 전 의뢰받은 이번 설계를 위해서 약 2주 반 동안 한국에 체류하면서 스케치를 했다.
아직도 정동 지역 일대에 많은 녹지가 남아 있어 인상적이었다고 밝히는 그는 덕수궁과 돌담길, 그 역사 경관을 살리기 위해 구조나 분위기는 물론 건축재료에 있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덕수궁과 가까워질수록 건물이 낮아지도록 하여 덕수궁의 전망을 가리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자연과 경관을 보호할, 마치 공원과 같은 곳을 만들 계획이다.
단순히 건축물 자체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와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를 포용할 수 있는 건축가로서 이번 프로젝트를 맡게된 마이클 그레이브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조화, 더 깊게는 한국의 문화와 미국의 가치관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또 내가 사는 곳, 내가 ‘속하는(belong)’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줄 건물을 지어낼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을 예정이라는 소문에 대해서 그는 ‘요를 깔고 잔다고 해서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가가 중요한 것 이라며 대사관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의 안뜰’ 처럼 만들겠다는 포부를 조심스럽게 밝혔다. 정치적인 이슈로까지 번지고 있는 이번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에디터가 혼수 품목 1순위로 꼽고 있는 알레시(Alessi)의 휘파람새(Whistling Bird) 주전자를 디자인한 그라면 섬세하고 꼼꼼한 손길로 남들과는 다른 작업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