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국의 선종 회화: 속도의 물질, 무의 충만함
<선종과 무(無): 안동국> 서문, 2004년 1월 31일 – 2월 26일
제프리 웩슬러 (럿거스 대학 부설 짐멀리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언뜻 보기에 현재의 안동국의 수묵화 전시는 예술가의 경력에 있어 특정한 시기를 또는 집중적인 순간까지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들은 함께 일관성 있는 시각적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백색의 화선지 위를 가로지르며 휩쓸고 가는 검은색과 옅은 회색의 표현. 이들 각각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수의 주요 붓놀림을 보이며 대부분은 튀기거나 떨어진 자국에 의하여 생동감을 띠고 있다. 예술가가 한 표면에서 다른 표면으로 이동하며 재빨리 나머지 종이의 배열을 채워나가고, 일시적으로 특정한 주제 내에서 공연한 영감으로 작업하는 장면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모인 이 작품들이 40년에 걸쳐 다양한 시점에 그려졌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중요하고 아주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흑백 회화가 안동국의 유일한 주제는 아니었다. 그는 짙고 밝은 색상의 추상화뿐만 아니라 풍경과 나무들의 형상을 담고 있는 조금 더 사실적인 작품들도 만들어왔다. 이 몇 가지 주제들은 때로는 수정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선종과 다른 동양 철학들을 통해 인지될 수 있는 자연의 순환적인 힘과 개인적이고 보다 포괄적인 문화적 관점에서 과거의 경험-전통-에 대한 작가의 인지를 암시하는 방식으로 다시 논의된다.
동아시아 문명의 중요 특징들 중 하나는 전통에 대한 깊고 변치 않는 존중이다. 이 관념은 지역의 문화, 철학 그리고 예술에 걸쳐 퍼져 있다. 사람들은 과거를 통해서 배우며, 교육과 경쟁의 시금석으로서 과거의 광범위한 성과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실제로, 만약 그 과정이 교훈을 얻었음을 보여준다면, 걸작의 복제조차도 창조적인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주제들로 돌아가는 것은 – 심지어 자신의 작품 속에서라도 – 상상력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연속성에 새로운 연결고리를 추가함으로써 이전의 성취를 기리고 과거의 지식으로 확장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안동국의 추상은 선종 수도승들의 회화의 덕망 있는 전통과 관련이 있다. 수세기 동안, 선종 철학의 한 표현은 형태의 극도의 간결함과 빠르지만 우아한 칠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이 이 예술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떄때로 정신적이고 시각적인 사건에서 추상화에 가까운 작업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이는 특히 서예에 적용해볼 경우에 그렇다) 이는 안동국의 수묵화의 대표적인 계보이기도 하다.
이들 회화의 전반적인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동양의 전통은 그들을 구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을 포함한 모든 인간 활동에 대한 자연 중심적인 관념이다. 전통적인 동양 예술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물의 외관의 기계적인 복제가 아니라 극(極)이라 불리우는 자연의 모든 면의 살아있는 본질을 포착하고 전달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동양 예술의 기저를 이루는 의도는 근본적으로 철학적이거나 추상적이다. 한 작가가 빈 종이에 수묵으로 빠르고 즉흥적인 선이나 얼룩 그리고 웅덩이를 표현함으로써 풍경화를 시작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이러한 표현은 사실상 추상적이며 자연과 관계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시각적이고 개념적인 틀의 역할을 하는데, 작가들은 그 위에 자연적인 형태의 형상을 나타내고 그들의 형태는 궁극적으로 첫 붓질의 자유로움으로부터 오는 신선함과 생생함으로 득을 본다.
안동국의 역동적이고 흩뿌리는 듯한 채색 방식은 특히나 자연의 본질을 일깨우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중 하나에서 볼 수 있는 소용돌이치듯이 튄 수묵의 자국과 넓게 그어진 한 획은 <빗 속의 부러진 나뭇가지Broken Branch in the Rain>라는 제목이 주어질 때 갑자기 혼란스러운 추상화에서 통찰력있는 상징으로 변모한다. 어떻게 비의 순간적인 현상을 표면에 실제 액체 방울을 흩뿌린 시각적인 흔적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부러진 나뭇가지를 만드는 물리적인 과정은 나선형의 꼬리와 강한 바람에 흩날리는 분위기에 대한 암시를 통해 활발하게 묘사된다. 비록 혼란 속에서의 나뭇가지의 고립이 특별한 날카로움과 함께 생명의 연약함을 이끌어낼지라도 말이다. 다른 작품들의 제목은 나무와 바람 또는 바다와 관련이 있다. <빗 속의 부러진 나뭇가지>는 명백히 상반되는 두 가지 회화적인 요소들에 대한 강렬한 도입부의 역할 또한 할 수 있다. 그리고 선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에 걸맞는 이 요소들은 이러한 작품들의 시각적이고 개념적인 효과에 이중적인 원천으로 작용한다. 각각의 그림은 두 요소들 사이에서 세심한 균형을 만들어낸다. 이들 두 요소는 상대적으로 밀도 있는 검은 붓질과 상대적으로 반사되지 않거나 거의 빈 공간의 확장이다. 검은 자국들은 굉장히 활발하고 강렬하다. 붓질은 표면 위를 쓸면서 검은색과 회색의 비행운을 남기고 미친듯이 질주하는 붓의 공격을 종이 위에 고스란히 남긴다. 모든 흔적은 극도로 빠른 속도로 남겨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붓질의 주목할 만한 점은 가장 폭발적인 붓질 마저도 구성적인 축과 시각적인 무게감의 초점으로 그림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붓질의 매여있지 않은 힘을 줄이지도 않는다. 또 하나의 선과 같은 역설처럼 말이다.) <음과 양의 투쟁Struggle of Yin & Yang>의 중앙에서 비틀리고 있는 두 붓질의 형상은 그 끝에 분출하는 듯한 수묵의 방울이 있고, 그 형상의 불규칙한 부분은 거친 바람에 갈갈이 찢어진 현수막처럼 들쑥날쑥하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거기에 존재하고, 강하고 유연하며 또 작품에 엄청난 시각적 영향을 준다. <선종의 원 IIZen Circle II>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고리형의 표현은 맹렬한 속도로 종이를 가로질러 툭 부러지는 듯한 붓질을 보여준다. 그러나 왼쪽과 오른쪽 모서리를 넘는 암시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고리는 여전히 어마어마하고 강렬하며 촉각적인 실체로 결집하여 작품에 닻을 내리고 있다. 어떻게든, 속도는 존재와 실체를 암시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작품들 중 많은 수에서, 붓질은 주변으로 휘어지는 튀기는 기법을 동반하고 표현의 밀도로부터 종이의 백색으로의 전이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가공되지 않은 공간은 각각의 작품에서 수묵이 칠해진 공간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안동국의 선종에 입각해 생각해보면, 이는 빈 공간도 아닐 뿐더러 “부정적 공간negative space”라는 서양의 개념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에 이는 우주를 가득 채우는 감지할 수 있는 존재인 ‘무(無)the Void’이며, 함축적으로 작품의 열린 공간이다. “여백”Empty space은 단순히 동양의 철학적 전통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존재의 충만함인 도(道)Tao와 그 속에 담겨진 힘인 기(氣)Ch’i로 가득 차 있다. 안동국은 이 개념들이 그의 예술에서 차지하고 있는 근본적인 위치를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이 전시의 제목을 “선종과 무Zen and Void”로 지었다. 이 단어들과 함께, 관람객들은 그로부터 그의 작품에 대해 충분한 지시를 받고, 그리고 나서 이 흥미로우면서도 심오한 작품들의 순수한 시각적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