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국의 작품: 향수와 미완의 꿈에 관한 기록
<안동국: 향수에 관한 기록> 서문, 2000년 9월 28일 – 10월 26일
고든 리 (뉴욕 시립 대학교 교수 & 미술 비평가)
우리들 각자는 과거와 그와 연관된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지난날의 푸른 언덕과 구불구불한 길, 양털 같은 구름과 노래하는 개울,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몇몇 단어들의 흔적, 망각으로부터 부수적으로 되찾은 사실들, 평상시의 관찰을 통해 추론된 상황들 – 향수는 때때로 우리의 감정의 결핍과 공허함을 채워주거나 우리의 현실로부터 손 쉽게 도피할 수 있도록 하는 심리학적인 임시방편의 기능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되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기억의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호한 세상으로의 여정은 사생활과 자기만족의 은밀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자아 확인의 한 과정일 수 있다. (이는 우울감화 환의의 자기도취적인 혼합 같은 것으로 이어질 수 있기도 하다.)
안동국은 그러한 기억의 파편들을 찾는 순례자이다. 그의 작품은 그의 머리에 심어진 꿈에 대한 미완의 기록이다. 고고학적인 관심에서부터 침범할 수 없는 가장 사적이고 가장 은밀한 내적 세계에까지 이르는 그의 과거로의 여정은, 가장 친숙하지만 낯선 땅을 항해하는 탐험가가 되고자 하는 호기심 그리고 열정과 함께 계속된다. 캔버스의 위의 광활한 대지에서 (나는 거의 전면균질회화처럼 보이는 작품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상상한다) 그는 그로 하여금 특정한 이미지를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윤곽을 사용하고 그의 한 축짜리 컴퍼스로 옅어지게 한다
그가 짜놓은 구성들은 색깔의 심리적인 효과나 그 자신의 욕망의 배열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추적하고자 하지만, 그의 즐거운 방랑을 채워줄 어떠한 정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텅 빈 백지위에 그의 자취를 기록하는 것은 막연하고 터무니없는 목표를 위한 헛된 노력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자신의 힘의 완전한 소진을 통해 자신의 꿈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이 욕망들의 영역 그리고 향수와 갈망의 공간은, 기억이 망각의 과정에서 당혹감을 얼마나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관한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당혹감을 보라색의 깊은 영역에서 견뎌내야 한다. 그가 두 개의 큰 캔버스 위에 균일한 붓질로 마무리한 표면 아래에는 그가 추구했던 과거의 흔적과 그가 다급하게 느낀 욕망의 기색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기를 거부하는 듯한 그의 마지막 저항의 증거를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파악될 수 있는 유일한 가시적 이미지는 한 마리의 돼지인데, 그것은 마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간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비록 그가 아주 강렬한 붓질로 저면(底面)을 덮었을지라도, 이것을 평면으로의 회귀 또는 복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렴하는 소용돌이 같은 표면의 아래에는 마치 감추어진 저면의 가려진 의미에 대한 열쇠인 듯 몇몇 표지가 숨겨져 있다.
바로 이것의 결과로 우리는 그의 과거를 향한 여정이 연대기적인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작품 앞에 서있을 때 그의 내적 의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여정은 새로운 출발이나 이미 구성된 것을 해체하는 작업의 시작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 해체는 그의 불확실한 기억의 해체이자 방법론과 사상의 정형화된 틀의 해체이다. 그래서 그는 규범이나 제도 또는 어떠한 다른 규칙과 관습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꾼다. 예를 들어, 그는 불규칙한 모양의 캔버스를 사용하면서 자유의 느낌을 추구했지만, 곧 그것이 오히려 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규칙적인 모양의 캔버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가 한때 자유라고 믿었던 것이 허구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것을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새로운 대지를 찾는 것을 시작하기 위해 이전의 땅에 편하게 자리잡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가 예술가로서, 마치 게임처럼 또는 순례로서 그가 내세울 수 있는 도전과제이기도 하다. 한편 그것은 회화의 불확실성을 묵인하려는 의지를 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회화의 규범에 대한 이 반항이 약속하는 바는 무엇일까? 현대 미술이 직면한 문제는 아마 우리가 첫눈에 그것의 긍정적인 면을 확정적으로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술이 의미 있는 설명이나 내레이션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 자신의 내적 맥락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는 이 시기에, 회화는 그 자신이 진실의 부재를 입증한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단순히 회화를 형식적 맥락으로 회귀시키고 그 복원을 위해 회화의 다층적인 의미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미술의 의사소통의 능력에 굴복하는 패배주의의 산물이어야 한다. 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해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안동국에 의해 이루어진 이 해체는 그가 내비치는 완벽한 자유를 얻기 위해 회화 그 자체 또는 세계와 같은 목적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이룰 수 없는 (완전한 자유의 실현이라는) 순진한 꿈을 이루기 위해 시도하며 폐쇠된 공간이나 진공 속에서 사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아니면 이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 내에서 자유의 이상적인 느낌에 독선적으로 중독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따라서 회화적 자유는 상호 의사소통을 전제 조건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